기록/책

『재와 물거품』 그리고 『여름 상설 공연』

moii 2024. 8. 18. 18:04

 
오랜 시간 연을 이어 온 사람이 태어난 계절을 축하하며 선사한 책 두 권.
 

 

수아는 밤에 태어났을 거야. 낮의 활기참을 모아 밤의 다정함 속에서 태어났겠지. 살을 에는 겨울바람에 머리를 들이밀고 나왔다가 많은 사람 중에 나와 눈이 마주쳤을 거야. 채 더오르지도 않은 햇살을 눈동자에 담아서 내 몸과 마음을 녹여 준 게 분명해.

99*100p

 

평소 바다는 짙푸른 색이지만 크고 강한 파도가 밀려오면 유화물감을 거칠게 바른 듯 두텁고 밀도가 있는 하얀 물거품이 본래의 색을 모두 덮어 버린다. 지금의 바다가 그랬다. 갑자기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파도가 밀려왔다. 불이 붙은 채 쓰러져 있는 사람도, 몸이 얼어붙어 도망가지 못한 사람도 모두 파도에 휩쓸렸다. 그러나 파도는 아무도 해치지 않고 물거품만 남긴 채 바다로 돌아갔다.

110

 
돌고도는 생에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두 사람
그 방향이 잘못되었을 지라도.
 
사랑은 때때로 모든 걸 망치기도 하지만,
원래대로 복구시키는 것 역시 사랑이다.
 
바다는 날마다 다르게 파도를 치겠지만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모든 계절을 한 번에 살아 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성실한 것일까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건 봄에도 겨울을 사는 사람만 알 수 있어
한 계절에 마음이 묶이면 모든 계절이 뒤섞여 들어오니까

몽타주

 

나는 또다시 무너질 성을 생각했다
부서진 미래가 전부 바다로 쓸려 가 버리면 우리는 어떡할까

그러면 내 미래를 나눠 줄게
짝궁은 두 손 가득 모래를 들어 올렸다
함께 꿈꾸면 그 미래는 커질까 아니면 작아질까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미래를 다 쓰면 너의 미래를 가져다 살게
다시 성을 쌓아 올리고

짝궁의 모래

 

지난 계절 사랑했던 것들은 저마다의 주머니에서
바지춤이나 발밑에서 바람에서 무언가 익어가는 소리에서
공책을 꺼내 들어 지난한 시간을 펼쳐 보였다
그을리고 까지고 거칠거칠한 그런 이야기를

나는 거의 누운 상태로
동쪽 끝에서부터 불길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지난 계절 사랑했던 것들은 앞다투어 일그러지고
공책이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꿈의 문을 닫고 돌아섰다

새로 산 공책

 
감정에 휩싸여 새로운 것을 들이게 되고
과거의 편린들이 내 방 내 몸 어느 한 구석에서 나를 붙잡을 때
고양되던 즐거움이 바스라지고
나는 모든것을 지운 채 허공을 응시할 수 밖에 없었다.
 
배부르게 먹고 죽지 않을 정로도 취한 친구들과 서로를 위로하며 밤을 보낸다
길고 어두운 밤을 건너기 위해선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온기가 필요하다
비틀거리는 우리가 서로 손을 맞대고 헤쳐나가는 시간 덕에
나는 비로소 안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