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책

두려움이 흔들고 지나간 마음 속에 한 문장의 기도가 남아 있어서.

moii 2023. 5. 4. 17:16

파쇄

구병모
위즈덤하우스

일단 마음 먹고 칼을 집었으면, 뜸 들이지 마

54p
드러낸 게 그냥 등이 아니라, 생살이 도려내진 자리에 나타난 근육과 뼈 같아서.
어쩌면 붉은 내장 같아서.
두려움이 흔들고 지나간 마음 속에 한 문장의 기도가 남아 있어서.

64p
그리고 그녀는 이 손길이, 훗날 설령 그가 없는 동안에라도 자신의 몸 속에 잔존하리라는 것을 안다.
 
67p
그가 알아서는 안 되고 알 필요 없는, 그러나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음이 불현듯 튀어나올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건 아마 흘러나오거나 새어 나오는 고요하고 점잖은 방식이 아니라, 얼기설기 서툴게 꿰맨 자리가 잡아채어 뜯기면서 비집고 나오는 모습일 것이다. 그 자리엔 주워담을 수 없는 말이, 찢긴 나비의 날개처럼 흩어져 있을 것이다.

80p
그것은 그녀가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리 쉽게 기울어지거나 꺾이지 않으리라는 판정과도 같은 포옹이며, 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격려이자, 완성된 몸에 대한 선물이다.
 
85p
손안에 쥔-애당초 쥔 게 있었던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과일과 같은 세상은 씨앗조차 남지 않고, 과육은 진작 분해가 끝난 시신과 같이 흔적도 없다.



요즘 빠진 구병모 작가의 신작이자, 파과의 프리퀄 소설.
조각이 손톱이 되기 전, 설익은 과일이던 시절을 그렸다
제목 ‘파쇄’는 기존 조각의 몸을 분절해 ‘손톱’으로 만드는 소설의 전 과정을 함축한 것으로 추측한다.

여물지 않은 조각의 마음과 너무 일찍 자라버린 그녀의 이성이 대비되어 서글픈 웃음을 자아낸다.

일그러진 투우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건 어쩌면 본인 역시 동경, 사랑, 감사가 섞여 일그러진 감정을 겪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각이 천국에 갈 수는 없겠지만, 그의 남은 생이 편안했으면 좋겠다
그가 거둔 생명은 헤아릴 수 없다. 그렇기에 조각의 사후세계가 평안하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하지만, 구병모를 통해 그의 인생을 훔쳐본 나로서는,
그가 류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 생의 즐거움을 느꼈으면 한다.
 
류가 그의 몸을 샅샅히 분해하여 조각으로 만들었듯
이번에는 그가 스스로 분절하여 평범한 삶을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