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책 8

『재와 물거품』 그리고 『여름 상설 공연』

오랜 시간 연을 이어 온 사람이 태어난 계절을 축하하며 선사한 책 두 권. 수아는 밤에 태어났을 거야. 낮의 활기참을 모아 밤의 다정함 속에서 태어났겠지. 살을 에는 겨울바람에 머리를 들이밀고 나왔다가 많은 사람 중에 나와 눈이 마주쳤을 거야. 채 더오르지도 않은 햇살을 눈동자에 담아서 내 몸과 마음을 녹여 준 게 분명해. 99*100p 평소 바다는 짙푸른 색이지만 크고 강한 파도가 밀려오면 유화물감을 거칠게 바른 듯 두텁고 밀도가 있는 하얀 물거품이 본래의 색을 모두 덮어 버린다. 지금의 바다가 그랬다. 갑자기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파도가 밀려왔다. 불이 붙은 채 쓰러져 있는 사람도, 몸이 얼어붙어 도망가지 못한 사람도 모두 파도에 휩쓸렸다. 그러나 파도는 아무도 해치지 않고 물거품만 남긴 채 바다로..

기록/책 2024.08.18

자유는 내게 낯선 폭력이고, 통제는 익숙한 폭력이었다.

오렌지와 빵칼 청예 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음가짐을 신봉하며 살았음에도 바 란 적 없던 어떤 면이 생겨났다. 이제 동전은 완전한 양면 을 가지게 됐는데, 낯선 면을 보고 있으면 원래부터 있던 면인지 동전이 통째로 바꿔쳐진 것인지 도통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저 성숙의 또 다른 모습이겠거니 싶어 판단을 유예했다. 어떻게든 악인이 되지 않는 방식만 선택하는 건 마음 안에 용수철을 꾹 눌러두고 손을 떼지 않는 일과 같았다. 예측 하지 못한 곳으로 튀지 않게끔 스스로를 절제하는 일. 그 결과로 지금의 나는 수원과 마주 보고 누워 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고 불합리했다. 선량함을 고집하기 위해 지켜온 선택들이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순간, 미래에 남는 건 원하지 않던 삶이라는 모순.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 이..

기록/책 2024.08.16

비상문

최진영 저, 변영근 그림 같이 비를 맞아 주더라고. 혼자 맞는 것보다는 덜 쪽팔리잖아, 그러면서. 비를? 왜? 우산이 없었어? ……. 말을 좀 제대로 해봐. 됐어. 혼자만 알고 싶은 것도 있는 거야. 그럼 결국 아무도 모르는 게 되잖아. 말로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게 있다고. 내겐 빛나는데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한창 살아 있을 때, 푸를 때는 왜 아름답다고 하지 않지? 말을 알아듣게 해. 푸를 때는 왜 덥다고 짜증만 내냐고. 여름은 덥고 더우면 짜증나지. 당연하잖아. 다 푸르니까 모르지 사람들은. 살아 있는 그 함성을. 시끄럽다고. 야, 최신우, 너도 그래. 내가 뭐. 시끄럽다고. ……. 너도 푸르고. ……. 아름답고. ……. 하루만 더 살아 줘. 뭐 달라진다고. 제발, 하루..

기록/책 2024.05.21

두려움이 흔들고 지나간 마음 속에 한 문장의 기도가 남아 있어서.

파쇄구병모 위즈덤하우스54p 드러낸 게 그냥 등이 아니라, 생살이 도려내진 자리에 나타난 근육과 뼈 같아서. 어쩌면 붉은 내장 같아서. 두려움이 흔들고 지나간 마음 속에 한 문장의 기도가 남아 있어서. 64p 그리고 그녀는 이 손길이, 훗날 설령 그가 없는 동안에라도 자신의 몸 속에 잔존하리라는 것을 안다. 67p 그가 알아서는 안 되고 알 필요 없는, 그러나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음이 불현듯 튀어나올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건 아마 흘러나오거나 새어 나오는 고요하고 점잖은 방식이 아니라, 얼기설기 서툴게 꿰맨 자리가 잡아채어 뜯기면서 비집고 나오는 모습일 것이다. 그 자리엔 주워담을 수 없는 말이, 찢긴 나비의 날개처럼 흩어져 있을 것이다. 80p 그것은 그녀가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라..

기록/책 2023.05.04